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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U/캠퍼스&라이프

북대, 그 풍경 속에 빠지다

북대, 그 풍경 속으로 떠나는 일일 여행                                   

 한 여행사의 북경 여행 일정에는 꼭 북경대 투어 코스가 들어갈 정도로 북경대는 아름다운 교정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북경대 학생의 신분으로 아름다운 캠퍼스에서 공부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과연 얼마나 북대를 알고 있을까? 너무 아름다워 이름조차 짓지 못했다는 未名湖, 학교의 급수대 역할을 한다는 博雅塔 이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극히 드물다.

따스한 햇살이 먼지 걷힌 북경 하늘을 내리쬐는 오늘.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북경대 교정을 데이트 해보는 건 어떨까? 혼자여도 좋다. 신발 끈 질끈 묶고 북경대 산책에 나서보자.

< 서문 풍경 >
西校门
발을 내 딛는 순간, 수많은 카메라의 플래시를 받게 되는 그곳, 바로 우리학교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 바로 서문이다. 고풍스럽고 단아한 느낌의 북경대학 이라는 내 글자는 마오쩌둥 주석이 1950년 친필로 쓴 것이다. 그 글씨는 붉은색의 학교문과 혼연일체가 되어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校友乔
서문을 지나가게 되면 “校友乔”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이 다리는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북경대학 학생들이 기부하여 만든 다리다. 다리의 이름이 교우교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货表
货表는 西门과 办公楼사이에 있는 잔디 밭 위에 좌우로 대칭하고 있는 기둥이다.
华表는 汉白玉라는 사람이 조각 한 것으로, 언뜻 보면 두 기둥의 크기와 모양,높이가 같은 1쌍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각 조금씩 차이가 있다. 货表에 얽힌 일화를 들여다 보자. 华表는 1724년에 제작된 것으로, 원래 安佑宫에 2쌍의 华表가 있었다. 1925년 燕京대학(북경대학의 옛이름)을 짓고 있을 당시, 미국의 한 목사가 3개의 기둥을 북경대학으로 가져왔고, 나머지 한 개는 시내로 옮겨져, 1931년에는 천안문길 남쪽에 가로로 눕여지게 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 해 여름, 북경대학 도서관에 신관을 건설할 당시, 나머지 한 개의 华表를 천안문에 있는 나머지 한 개의 기둥과 한 쌍인 줄 알고 잘못 옮겨가서 지금 북경대에는 짝이 다른 각각의 기둥이 남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옮겨갔던 다른 하나의 기둥은 아직도 그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智慧之树,
서문에서 勺园쪽으로 오는 길에 왼쪽으로 보이는 校史馆을 지나 보이는 외국인 동상은 스페인 작가  塞万提斯의 동상이다. 그 길을 따라 쭉 오다 보면 국제관계학원건물 옆에 커다란 나무를 볼 수가 있다. 이 나무의 이름은 지혜의 나무로 사람의 뇌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전에는 이 나무 밑에서 공부를 하면 머리에 잘 들어온다고 해서 많은 학생들이 이 나무 밑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쉽게도 지혜의 나무가 있는 잔디밭은 출입이 불가하다.

北大烈士碑
국제관계학원과 잔디 밭 사이의 도로로 쭉 걸어오다 보면 북경대에서 유일하게 개방되어있는 잔디밭, 静园이 나온다. 二体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는 잔디밭 가운데에 커다란 비석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비석은 바로 중국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학생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北大烈士碑
다. 由阵云이라는 사람이 친필로 쓴 글자는 국가를 위해 혁명에 앞장섰던 학생들의 마음을 대표하며 이 자리를 지키고있다.
 
<미명호 풍경>

钟亭
- 미명호의 서쪽에 있는 정자로, 정자내에는 매우 큰 동종이 있다. 종의 윗 부분에는 “大清国丙申年捌月制”이라 새겨져 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새벽 6시부터 저녁 11시 까지, 30분마다 한번씩 종을 쳤다고 한다. 이전에는 학교 교실이 미명호 근처에 자리하고 있어 수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용도였다. 종을 관리하는 주(州) 선생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한결같이 종을 쳤다고 한다. 그의 근면함이 당시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 이외에도 종에 대한 몇 가지의 이야기가 젼해져 내려오고 있다.

石舫
- 미명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건륭황제가 1747년에 미명호에 하나의 돌로 만든 배 모양의 건축물을 세웠다. 그걸 본 和坤은 시샘을 하여 자신의 것도 하나를 제조하였다. 후에 원명원의 화재로 인해 지금의 기초만 남게 된 것이다. 현재는 북경대 미명호로 옮겨져 미명호를 나타내는 중요한 징표가 되었다.

 (사진은 이 후 포토 에세이에서...)

글_ 양정아, 박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