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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U/칼럼

Rock듣는 소년 소녀에게

신입생에게 보내는 편지
Rock듣는 소년 소녀에게

개학을 앞두고 북경으로 돌아 온 나는 그 아이를 만나기 위해 학교 안에 있는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나보다 여섯 일곱 살 즘은 어린 그녀는 누구보다도 건강한 웃음을 터뜨리고 어떤 외부적인 요건에도 자신의 빛을 잃지 않곤 한다. 나는 그녀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자그마한 선물 몇 가지를 전해 주고 돌아왔다. 그 아이는 쑥스러워 하면서도 기뻐했다.
한 참 지나 그 친구를 다시 찾아 갔을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럴 필요 없는데.’

하지만 역시 그녀의 마음이라, 선물을 고르고 정성껏 포장하고 나를 기다렸을 생각을 하며 기쁘게 받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그녀가 내게 건넨 것은 다름 아닌 Avril Lavigne의 앨범. 수많은 앨범 중 그녀는 어째서 내게 Avril Lavigne의 음반을 건넨 것일까. 그녀는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Pop Rock으로 분리되는 Avril의 음반은 혹자들의 비평을 받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이전부터 Rock Band에서 활동을 해왔으며 자신 스스로를 Rocker로 자처하고 있고 좀 더 나은 Rock음악을 하기 위해 본인 스스로 노력하고 의지를 표명한다는 점에서 Rocker로 인정하고 싶다. 또한 그녀가 예쁘장한 외모 혹은 기존의 힘 있는 Rock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를 가졌음에도 세상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을 던지고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다는 점은 이미 어느 Rocker 못지않게 저항정신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는 나의 어린 친구 역시 이런 내면의 외침을 내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를 어리게만 보지 마세요. 나를 단순히 예쁘게 생긴 아이라고만 보지 마세요. 어떻게 내면의 열정을 분출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내 속엔 꿈이 있답니다. 하루에 10시간씩 서서 일하고 학교도 다니지 못하지만 언젠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그 날이 올 거예요.’

사실 부조리에 분노하고, 반대하는 것은 자신 주관이 성립되는 찰나이며, 인격으로 서는 계기이다. 열심히 생각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모두 이런 과정을 겪으며 이는 오랜 무지의 시간, 인내와 고독의 시간 뒤에야 찾아오곤 한다.
 
프랑스의 성형예술가 Orlang은 어릴 때부터 아름답고 정숙한 외모로 많은 남자아이들의 시선을 받아왔다. 적지 않은 남자들은 그녀 안의 불꽃과 열정을 보지 못했고 귀여운 외모를 가진 그녀의 성격은 당연히 여성적이고 순종적일 것이라 상상하고 기대했다. 이런 근거 없는 상상과 기대는 Orlang이 자신의 내면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고 그녀는 반항을 시작했다. 모두 부러워하는 자신의 외모를 아름답지 않은 모습으로 성형하는 예술 활동을 통해 사회에 일침을 가했다. 그녀가 이렇게 과격한 방식으로 밖에 문제를 제기하고 반항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녀는 세상에 당당히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과 달리 생각합니다.”라며 반항했다.
 
우리들은 성장하며 욕망을 느끼고 무엇인가가 가치 있는 것이라 믿는다. 가령 공부를 하고 싶다. 예뻐지고 싶다. 날씬해지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폭 넓은 인간관계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그 욕망이 과연 내가 욕망하는 것인지 사회가 욕망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혹시 너무 나태해서 스스로 서는 길을 포기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반항의 길을 포기한 채 세상의 욕망이 내 욕망인양, 세상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을 충족시키며 그것이 행복이라 믿으며 살고 있지는 않은 걸까.

우리가 너무 나도 잘 알고 있는 위대한 사상가 루쉰도 이 점은 아쉽다. 루쉰은 어머니의 청을 차마 거역하지 못해 사랑하지도 않는 여성과 결혼했고 결국 이 일은 한 여인의 인생은 물론 자신을 외롭고 고독하게 했다. 스스로 혁명에 참가하고 평생을 탐구하고 반성하는 삶을 산 루쉰에게도 부모님은 거역할 수 없는 대상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효라는 가치를 아름답게 평가한다. 하지만 효라는 가치에 앞서 있는 것은 한 인간의 삶이다. 부모님을 귀하게 여긴다면 자신도 귀하게 여겨야 하고 한 여자의 일생도 귀한 것이다. 부모님의 청이라서 반항하지 못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훗날 그의 회고대로 자신이 평생 혁명에 투신할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에게 부인은 있어도 없어도 그만, 어머님께서 좋아하시면 그것으로 된 것이라는 고백은 성숙하지 못한 인간의 탄식처럼 느껴진다. 우리에게 반항은, 아름다운 반항은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 왜 모든 사람들이 결혼을 해야 한다는 세상의 욕망에 충실해야 하나. 안타까울 따름이다. 
 
세상은 우리들에게 세상의 욕망을 강요한다. ‘너는 해야만 한다고’ 어지럽게 소리친다. 가만히 생각해 보자. 세상의 욕망에 나를 맡기면 도대체 나는 어디로 흘러갈까. 그 수많은 소리들은 나를 어디로 이끌까. 성인이 된다는 것은 문제인식을 한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전에 아무 일 없이 잘 참았던 것에 아니라고 단호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반항만으로는 불완전하다. 반항과 자유를 잘못 이해했던 까마귀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다.

어느 날, 까마귀가 사람에게 잡히고 말았다. 그 사람은 까마귀의 발목에 끈을 매어서 아들에게 주었다. 그날부터 까마귀는 소년이 주는 먹이를 먹으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발목이 묶인 채로 먹이를 얻어먹는 일이 몹시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이 한눈을 파는 사이 숲속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숲으로 돌아온 까마귀는 잘못하여 발목에 달린 줄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다. 까마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나뭇가지에 뒤엉킨 끈을 풀어 보려고 했으나, 긴 끈이 여기저기에 뒤엉켜 아무리 애를 써도 풀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무에 매달린 채 굶어죽게 된 까마귀는 슬프게 울면서 말했다.
 “도망치면 자유롭게 살줄 알았는데 이제 먹이를 얻어먹을 수조차 없게 되었어.”

 굶어죽게 되자 발목이 묶인 채로 먹이를 얻어먹는 삶을 그리워하는 까마귀는 자유의 참 의미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이유로 억압에서 벗어나기만을 위한 반항은 반쪽자리 반항에 불과하고 온전한 자유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겐 ‘나는 하고자한다’라고 소리 칠 수 있는 사자의 정신이 필요하지만 아닌 것을 대체 할 수 있는 신성한 창조를 통해서만 아름다운 반항을 완성시킬 수 있다. 때론 윤리라는 이름으로 혹은 의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라고 말하는 것들, 그들 앞에서도 서슴없는 부정과 신성한 창조. 이것이 지금Rock을 들으며 자신의 분노를 미약하게 표출하고 있는 젊은이들이 진정 습득해야 할 기술이며 미덕일 테다.

참고 서적: 카뮈의 이방인,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글_차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