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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기타

중국 역사상 최고의 황제, 康熙帝

중국 청나라를 최고강국으로 이끌어간 강희제에 대해…

중국에서의 마지막 왕조 청나라, 비록 만주족이 세운 나라이기는 했지만, 그 옛날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와는 달리 한족에게도, 관용적인 정책을 베풀어서 200년 넘게 통치를 할 수 있었는데요, 그 중에서 특히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이 3명의 황제가 즉위 하던 때, 강건성세라고 불리 우는 이때가 바로 청나라의 전성기라고 한답니다. 이 1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청나라의 황금기를 이룩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곳에서 유독, 강희제를 강조하고 또한 강희제에 관해 글을 쓰는 이유는, 그 어느 때 보다 저의 관점으로 바라 봤을 때, 그 어느 다른 중국의 황제 때 보다 더 완벽한 통치를 이룩한 점에 또 어떻게 보면, 중국역사상 최고의 황제라는 깊은 인상을 얻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강희제는 과연 어떤 황제였을까요?


우선, 강희제에 관해 간단한 소개를 할까 합니다. 우선 강희제는 청나라 4대의 황제로서, 시호는 인황제(仁皇帝)로 불리우며, 또한 묘호는 성조(聖祖)로 추대되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희는 바로 연호랍니다. 강희제의 삶을 간략하게 말하자면, 출생때는 1654년 그리고 1722년에 사망하였으며, 1661년에 황제로 정식으로 등극을 하게 됩니다. 강희제가 황태자로 선정 된 데에는 당시 강희가 천연두에 걸린 적이 있어서 마마자국이 있는걸 보고 골랐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이때가 8살이였고 그리고, 13세 때 어린 나이에 혼인을 하고, 14세 때부터 태황태후의 도움으로 강희제가 직접 친정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로부터, 69세로 사망하기 까지 61년간 청나라를 통치 하였고, 이 기간은 중국역대황제 중 최장즉위기간을 자랑합니다. 강희가 통치하던 61년간, 강희제는 우선 내정과 외정을 정돈하여서 나라를 안정하는데, 힘썼습니다. 안으로는 ‘삼번의난’을 진압(1673년), 그리고 밖으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등의 일에 힘을 썼습니다. 또, 소수민족 분리세력 진압을 통해, 내부의 통일에 힘쓰며, 지금의 중국영토를 거의 만들어 놓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강희제의 내정에 관해서 한번 살펴 보겠습니다. 강희제가 내정에서 해낸 가장 큰 일은 ‘삼번의난’을 진압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삼번의 난을 말하자면, 삼번은 청나라가 중원에 진입 후, 여러 반란들을 진압하기 위해 명나라의 장수들을 이용하였습니다. 명나라 장수 중 오삼계, 상가희, 경계무 이 세 사람은 청나라에 충성하고, 남은 청을 향한 반란무리들을 진압하고, 청나라가 이들을 각각 남방에 번왕으로 봉하게 됩니다. 이 삼번은 독자적인 정권을 유지하며, 엄청난 양의 세금으로 청나라의 경제를 위협하고, 또한 청나라를 언제든지 공격을 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 인해 위협세력이 되어있었습니다. 강희제 즉위 후, 삼번을 철폐하는 명령을 내리자 위협을 느낀 삼번의 왕들은 연합을 하여, 강희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삼번의 난 입니다. 강희제의 침착한 대처, 그리고 삼번세력 내부의 불화 등으로 인해 난은 진압이 되었고, 이로 인해 청나라는 삼번에 경제적 지원을 할 필요가 없게 되어, 경제적으로는 더욱 부강해지면서, 세금의 징수양도 줄이면서, 내부의 안정을 꾀하였습니다. 또한, 1683년에는 정성공 이후, 정씨가 쭉 차지하고 있던 대만을 정벌하면서, 청나라의 내부의 지배를 완성시키게 됩니다. 정치상에서는, 남서방(南書房)을 설립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위의 내란을 평정후에, 1711년에는 인두세를 정액화하여,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덜어 주었다고 합니다.

외정상으로는,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1685년 그리고 1686년에 두차례의 전쟁을 거치면서, 1689년에 양쪽이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하면서, 국경를 명확하게 합니다. 또 1690년 중가르부의 갈단 분리세력을 토벌하면서, 외몽골을 청나라영토에 편입시키게 됩니다. 또한, 서장을 정벌하여, 청의 영토에 편입 시키게 됩니다.

국내외 정치에서의 성공은 문화에도 반영되어 중국 최대의 유서(類書)인 《고금도서집성》의 편찬과 《강희자전》의 출판을 비롯하여 많은 서적을 편찬하였다고 하네요. 또한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사들로부터 서양의 학문과 기술을 도입하게 하였으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위도(緯度)를 적은 정밀한 지도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작성시키는 등 문화발전에도 기여하였답니다. 비록, 만년에 후계자 문제로 고통을 겪고, 황태자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으나,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1722년 12월 20일 병사하였다고 합니다.

[평가]
뭐,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을 저 혼자서 평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지만, 제 평가는 이렇습니다. 비록, 말년에는 후계자 문제, 세금제돌 인한 청나라의 재정난을 야기 시키기는 했지만, 내정과 외정을 충실히 하여, 국가를 튼튼히 하고, 부강하게 만들었다는 이점은 상당히 높이 삽니다. 사실 중국 그 어느 왕조 때에도 이렇게 최장기간 즉위하면서, 나라를 부강하게 한 황제가 없던 이유인 것 같네요. 또한, 서양문물에 대해 개방적이 였다는 점이 주목 할 만 한데요. 당시에, 서양문물에 그래도, 개방적 이였던, 군주는 조선의 정조대왕 하고 강희제 인데, 강희제는 서양문물에 눈을 떠 선교를 허락 하기도 하여, 중국 발전에 힘을 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해서 내린 결론은 강희제는 애민애국의 군주 인 것 같습니다.

[참고]
중국입시역사교과서(2007년판본)(p.50~54)
百度중국검색포털사이트검색( http://www.baidu.com/s?ie=gb2312&bs=%B7%CE%B0%A9%B5%C4%B6%A8%D2%E5&sr=&z=&cl=3&f=8&wd=%BF%B5%CE%F5&ct=0 )
네이버 백과(일부인용 및 사진)

글_ 문성곤
PKU blog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