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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U/칼럼

한국의 보물

2008년 겨울, 우리는 한국의 국보1호가 눈앞에서 타버리는 것을 바라볼 수 밖에 없던 참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번 사건은 외신 매체에서도 큰 이슈가 되었고, 한국 국민들에게도 큰 상처로 이슈화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큰 사건이 일어나서야 국보에 대해 관심을 갖기보다는 그전에 우리나라 국보, 유산과 역사에 대해 이해하고 유학생으로써 외국학생들에게 우리나라를 알리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국보2호 원각사지십층석탑
지정연도: 1962년12월20일 소장: 탑골공원 시대: 조선시대 크기: 높이 약 12m 분류: 석탑
1962년12월20일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12m이며 이 탑보다 약 120년 전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경천사 십층석탑(국보86)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다. ‘아(亞)’자형의 3층 기단, 이와 같은 평면의 3층 탑신, 네모꼴로 된 4층 이상의 탑신이 경천사 십층석탑과 기본적으로 같다.

탑신부는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하여 기둥•난간•공포(栱包),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한 수법이다. 옥신(屋身)에는 수많은 부처•보살상•천인(天人)등과 구름•용•사자•모란•연꽃•인물•새•선인(仙人)등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세련된 석탑이다.
1455년(세조11)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가 세워졌으며 1467년(세조13)에 십층석탑이 건조되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국보3호 북한산 신라진흥왕순수비
지정년도: 1962년12월20일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시대: 신라 크기: 비신높이 1.54m 너비9.69m 두께0.16m 분류: 비
1962년12월20일 국보 제3호로 지정되었다. 비신(碑身)의 높이1.54m, 너비 0.69m, 두께 0.16m이고 파손이 우려되어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4기(基)의 진흥왕순수비 중 하나로, 화강암으로 된 이 비석의 형태는 다른 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다. 비신의 상단(上端)에 1단의 촉을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개석(蓋石)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비신을 연마(硏磨)한 후 정면에 12행을 새겼으나 윗부분은 심하게 마멸되었고 제12행은 판독이 불가능하며, 그 밖에도 자획이 분명하지 않은 곳이 많다. 따라서 1행의 자수(字數)도 확실하지 않으나 30자가 넘을 것으로 보인다. 자체(字體)는 육조(六朝)식의 해서(楷書)이고 자경(字經)은 3cm이다.
글 뜻은 다른 3비의 비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전반부는 순수의 사적(事蹟)에 관한 것이고, 후반은 수행한 인명(人名)을 열기(列記)한 듯하다.
비석 측면에는 1816년(순조 16)과 그 다음해에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가 실사내독(實査來讀)한 사실이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己未八月三十日李濟鉉龍仁人,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 六十八字’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후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현재 많은 부분이 절단 또는 손상되어 있고, 비신의 뒤쪽에는 무수한 총탄 흔적이 남아있다. 비문에 명기(明記)되어 있었을 연호 간지(干支)가 마손되어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진흥왕 16년 왕이 북한산에 순행(巡幸)한 사실이 있으나 이를 곧 비의 건립연대로 보기는 어렵고, 남아있는 글자의 내용을 검토하면 568년(진흥왕29)이후 진흥왕 생존시의 일로 추정된다.

♦국보4호 고달사지부도
지정연도: 1962년12월20일 시대: 고려 초기 크기: 높이 3.4m 종류: 부도
1962년12월20일 국보 제 4호로 지정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부도로 높이는 3.4m이다. 경기도 여주군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지에 위치한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제 4대 광종 이후 역대 임금의 비호를 받아 크게 융성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부도란 흔히 승탑이라고도 하는데 승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일종의 무덤이다.

전형적인 8각 원당형(圓堂形) 부도로 신라의 양식이 비교적 잘 남아있는 고려시대 초기 부도이다. 상륜부가 없을 뿐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다. 부도의 기단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짜여진 8각지대석 위에 각기 1석씩으로 조성된 괴임대를 놓고, 그 위에 하대석•중대석•상대석을 얹은 모양이다. 하대석(下臺石)에는 옆면에 안상(眼象), 윗면에 복련(覆蓮)을 새겼고, 간석(竿石)에는 거북을 중심으로 하여 네 마리의 용(龍)과 구름 무늬를 조각하였는데, 그 솜씨가 웅혼(雄渾)하고 대담하다.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을 돌리고 날씬한 8각 탑신을 놓았으며, 각 면에 문비형(門扉形)과 사천왕상을 새겼다. 비교적 두꺼운 옥개는 전각마다 높직한 귀꽃을 새겨서 장식하였다.
고르게 갖춘 조형과 세련된 조각수법은 장중한 기풍을 풍기고, 또한 신라 석탑의 기본형을 따르면서도 고려시대의 웅장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868년(경문왕 8)에 입적한 고려 말의 고승 원감(圓鑑)의 묘탑(墓塔)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국보5호 법주사 쌍자석 등
지정연도: 1962년12월20일 소장: 법주사 시대: 통일신라시대 크기: 높이 3.3m 종류: 석등
1962년12월20일 국보 제 5호로 지정되었다. 법주사 대웅전과 팔상전 사이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쌍사석등으로, 높이는 3.3m이다. 간주(竿柱)에 변화를 주어 특색을 발휘한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8각석등이다.

지표에 놓인 넓은 팔각 지대석(地臺石)은 아래위에 테를 돌리고 우주형을 표시하였다. 하대석에는 8각으로 꽃잎 속에 화형이 장식된 단판복련 8엽이 조각되었다. 8각 간주를 대신한 쌍사자는 뒷발을 하대석에 버티고 서로 가슴을 대고 마주 서서 앞발로 상대석을 받쳤으며, 머리는 들어서 위를 향하고 있다. 상대석에는 단판의 앙련을 이중으로 조각하였다.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네 곳에 직사각형 화창(火窓)을 내었는데, 화창 주위에 작은 구멍이 있어 다른 기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널찍한 8각 개석(蓋石)에는 조식(彫飾)이 없어 소박하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정상에는 둥근 보주(寶珠)가 얹혀 있다.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의 하나로 그 조성년대(造成年代)는 성덕왕(聖德王) 19년(720)으로 추정된다. 이 석등은 조각수법과 넓은 지대석, 옥개석 등의 비례에서 장중한 품격이 넘친다. 특히 일반적인 신라 석등이 간주로 9각 기둥을 사용한 데 비해 두마리의 사자로 이를 대신함으로써 특이한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획기적인 시도는 후대에도 영향을 미쳐 이를 모방한 작품이 나타났다.
특히 사자는 갈기가 있고 몸통과 다리에는 근육까지 생생하게 표현되어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높으며, 법주사 팔상전의 서쪽에 있는 사천왕석등(보물 15)과 함께 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국보는 말 그대로 우리 조상들의 혼과 긴 역사가 담겨있는 우리가 지켜야 할 귀중한 보물이 다. 얼마 전 문화재청은 숭례문 화재 100일을 맞아 숭례문 복구 계획을 공식 발표했다. 지난 2월 방화로 소실된 숭례문을 2012년쯤 일제가 훼손하기 전 모습으로 복구하겠다는 방침이다. 국보 1호는 한순간에 눈앞에서 무너져 버렸지만, 그것을 다시 살리기에는 4년이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온 국민이 우리 보물의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인 가치를 항상 기억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글_ 이미란